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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판: 기억, 환대, 그리고 연결의 이야기 (최유준 평론가)
24. 12. 2.
‘판: 기억, 환대, 그리고 연결의 이야기(이하 ‘판’)’는 광주 월곡동의 고려인 마을을 소재로 삼음으로써 ACC 창제작 공연 작품들에 요청되는 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에 일차적으로 부응하고 있다. 나아가 아시아를 포괄하는 지리적 범위에서 횡단지역적(translocal) 보편성을 담은 메시지로 ACC 창제작 공연의 모범적 사례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으며, 향후 재공연을 통해서 발전될 경우 ACC의 레퍼토리 공연으로 자리잡을 만한 잠재력 또한 충분해 보인다. 이 공연은 형식적인 면에서 일부 관객들에게 낯설어 보일 수 있지만 최근 공연 연출의 새로운 트렌드(연출 의도에 따라 미리 촬영되고 편집된 영상 매체의 적극적 활용, 배우들의 자기수행적 서사 만들기 등)를 반영하고 있어서 오래지 않아 관객들 일반에게 익숙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한다.
사실상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을 단순한 극 예술이나 퍼포먼스로 바라본다면 그 실험성이 두드러져 보이지않을 수 있고, 몇 가지 점에서는 식상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음악극’으로서의 특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좀 더 많은 실험성과 독창적인 면모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판소리와 ‘심청가’를 극의 주제나 서사와 연결되는 단순한 소재적 착상으로 다루었다기보다는 사실상 ‘서사극’으로서의 판소리 그 자체에 대한 대안적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판소리’의 대표 양식인 창극의 경우 최근들어 도창(導唱)을 두던 초기 양식까지 지양되면서 서구 전통의 뮤지컬이나 오페라 양식에 점점 더 근접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판’을 보면 그 제목이 암시하듯 ‘판소리’의 무대를 대안적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전통 판소리 양식은 이른바 ‘제4의 벽’을 가로지르는 잦은 ‘소격 효과’, 그리고 배우의 다매체적(노래, 말, 몸짓 등) 서사 전달을 통한 청중과의 깊은 정동적 상호작용을 특징으로 한다. ‘판’은 이와 같은 전통 판소리의 양식적 핵심을 휘발시키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동시대적인) 음악과 몸짓 연출, 매체 활용의 요구에 응답한다고 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의식적으로 설정해 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판’에서 세 명의 등장인물은 양식적인 면에서 전통 판소리 창자의 분할된 페르소나들이라 할 수 있다. ‘판’은 청중을 서사에 직접적으로 개입시키는 몰입형 퍼포먼스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지만, 대신에 브레히트적 ‘서사극’의 목표인 극적 수행을 통한 배우와 청중 모두의 정서적 인식의 변화를 꾀하며 이는 상당 부분 성공적으로 보였다. 판소리 양식 자체가 갖는 지역성을 고려할 때, 음악극이자 ‘서사극’으로서 ‘판’의 트랜스모던(transmodern)한 양식적 실험성은 ACC에서 좀 더 주목하고 그 성과와 잠재성을 인정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판’이라는 제목이 드러내는 좀 더 명시적인 의미는 ‘장소’다. 인류학자 김현경이 말하듯 ‘장소’는 환대를 위한, 그리하여 인간성을 나누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좁혀보면 정체성이 머무는 일차적 장소는 ‘신체’이며, 그 장소와 신체에 형성되는 기억이 인류학적 장소와 인간성을 형성한다. ‘판’은 ‘장소를 내어주는 것’, 그 환대가 갖는 신체적 의미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행위와 연결시켜 전체 서사를 이끌어 간다. 그리고 장소에 따른 음식의 변형과 신체적 기억의 취약성을 짚으며 디아스포라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나아간다. 이와 동시에 현대화 된 한국인 자신의 유동적 정체성(등장인물들의 자기서사만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음악, 몸짓 등을 통해 공감각적으로 표현되는)을 고려인의 디아스포라 정체성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 ‘연결’은 특히 한국인과 고려인이 공유하는 현대사의 기억을 바탕으로 ‘심청가’의 서사를 변용함으로써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더욱 설득력 있게 연출되었다.
(최유준 음악평론가・전남대 교수)